"사람 사는 건 다 똑같네"…서양의 '김홍도 아재' 그림 보니 '소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3-03-04 09:15   수정 2023-04-27 16:33


누구나 한 번쯤 학교 숙제를 깜빡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차례차례 앞으로 나가 선생님에게 숙제 검사를 받는 친구들. 내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얼굴은 화끈화끈 달아오릅니다. 괜히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고요. 칭찬받은 친구는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오고, 간신히 검사를 통과한 학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네요. 숙제를 깜빡했거나 엉망으로 해온 학생은 야단을 맞습니다. “손바닥 이리 내!”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한결 더 불편해집니다.


300년 전 네덜란드의 학교도 분위기는 비슷했나 봅니다. 네덜란드의 장르화(=풍속화) 거장 얀 스테인(1626~1679)의 이 작품에는 아이들의 생생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엄한 표정으로 매를 든 선생님과 우는 아이를 비롯해 이 장면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학생, 급하게 자신의 숙제를 다시 점검하는 학생, 뒤에서 열심히 숙제를 고치는 학생도 보이네요. 그런데 이 그림에서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듭니다. 100년쯤 뒤 조선의 단원 김홍도(1745~1806)가 그린 풍속화 ‘서당’과 구성이 쏙 빼닮았기 때문인데요.


2023년 지금 교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요. 일단 회초리는 그림에서 빠지겠지요. 지금 한국과 네덜란드는 체벌을 금지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모습은 별 차이 없을 듯합니다. 역시 사람 사는 건 언제 어디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테인의 유쾌하면서도 사람 냄새 나는 그림을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집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스테인의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평범한 아저씨’가 거장으로 평가받는 이유
네덜란드 화가 하면 ‘빛의 화가’ 렘브란트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베르메르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이들 못지않게 유럽에서 사랑받는 화가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스테인입니다. 그는 서민들의 삶을 아주 사실적으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그린 작품들로 유명합니다.

그림 실력 하나는 미술사에 남을 정도로 대단했지만, 그걸 빼면 스테인은 사실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났고 인생에 특별히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습니다. 성격도 평범했지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살았고, 성격은 좀 못난 구석도 있었지만 대체로 유쾌한 편이었고,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들처럼요.


스테인은 1626년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양조장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스테인은 스승 몇 명을 거쳐 풍경화 대가 얀 호이엔(1596~1656) 밑에서 수업받기 시작합니다. 지난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 다뤘던 ‘마이너스의 손’ 말입니다. 그리고 스테인은 스승의 딸과 사랑에 빠져 속도위반 결혼을 합니다. 그의 나이 23살이었습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던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나는 인물도 잘 그리고, 풍경도 잘 그리고, 정물이나 동물도 잘 그리고, 원근법과 조명, 색을 모두 잘 다룬다. 하지만 어느 분야에서 1등이 되기에는 실력이 살짝 부족해. 그렇다면…. 전부 다 그리면 되겠네.

그래서 스테인은 일상생활 속의 소소한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서양에서는 장르화, 우리나라에서는 풍속화라고 부르는 그 유형의 그림이지요. 아무렇게나 결정한 것 같지만 사실 이는 스테인의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신의 한 수’였습니다. 그림 실력을 빼면 평범했고,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잘 이해했던 스테인.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일상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오리가 ‘푸드덕’…아저씨는 못 말려
스테인은 장르화가로 빠르게 명성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65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여파로 갑자기 그림 시장이 얼어붙었습니다. 그림만 그려서 먹고 살기 힘들어진 스테인. 양조장을 임대해 술 만드는 사업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양조장 사업 역시 잘 굴러가지는 않았습니다. 경기가 워낙 안 좋았던 데다, 스테인이 사업에 재미를 못 붙였던 탓이 컸죠. 기록에 따르면, 스테인을 보고 속이 터진 아내가 “가족은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냐! 이왕 하는 거 활기차게 좀 해봐!”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응이 기가 막힙니다. “알겠다”며 일단 순순히 돌아선 스테인. 다음날 아내가 양조장에 들어서자, 아이고! 갑자기 뭔가가 푸드덕거리며 눈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주위를 둘러본 아내. 양조장 술통에서 웬 오리들이 헤엄치고 있습니다. 스테인이 씩 웃으며 하는 말. “이제 좀 일터가 활기차지?” 썰렁하면서도 속 터지는, ‘아재 개그’ 그 자체죠.

당연히 아내는 엄청나게 화를 냈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얀 스테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렇게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해학적인 그림들에는 이런 성격이 잘 반영돼 있습니다.

스테인은 평생 성실히 그림을 그렸지만 벌이는 시원찮았습니다. 결코 스테인의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고, 17세기 중후반 네덜란드 경제가 워낙 안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장인인 호이엔을 비롯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렘브란트, 베르메르도 별로 살림이 넉넉지 못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하지만 스테인과 가족들의 사이는 좋았습니다. 아이를 8명이나 낳았고요. 아이를 즐겨 그리고, 잘 그렸습니다. 그림만 봐도 그가 좋은 아버지였다는 게 느껴집니다.


스테인은 따뜻한 이웃이자 좋은 친구기도 했습니다. 아래 그림의 사람들은 스테인의 이웃집에 살던 제빵사 부부입니다. 스테인은 갓 결혼한 이들을 위해 초상화를 그려 줬습니다. 당시에는 빵이 갓 구워져 나올 때마다 뿔피리를 불었는데, 뿔피리를 부는 소년은 당시 일곱 살이던 스테인의 아들입니다.

스테인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과한 수준은 아니었고요. 어려운 사람에 대한 동정이나, 빈부 격차에 대한 아쉬움 등 보편적인 생각을 표현했지요. 아래 그림처럼요. 참고로 이 그림은 2004년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에 1190만유로(약 165억원)의 가격으로 팔렸습니다. 벌써 19년 전 일이니까 지금은 훨씬 비싸겠지요.

여러 가지 사회적 교훈을 담은 그림도 많이 그렸습니다. 아래 그림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에 나온 ‘바람난 신부를 둔 신랑’입니다. 한 여관에서 열린 결혼식 피로연 모습을 담은 이 그림에서 신랑과 신부는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 앞에 서 있습니다. 신부의 배를 자세히 보면 약간 불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신랑은 결혼식용 화관 대신 지푸라기가 꽂힌 초라한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들 뒤에 있는 남자는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에 손을 대고 있고요. 신부가 바람을 피웠다는 뜻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둘을 바라보며 조롱 섞인 웃음을 띠고 있네요. 스테인은 ‘간통을 삼가라’는 교훈을 퍼뜨리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좀 평범하면 어때
스테인은 53세가 되던 167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그는 생전 예술계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인지도나 평가는 렘브란트나 베르메르에는 조금 못 미치는 편입니다. 한때 미술계 일각에서 ‘작품이 진지하지 않고 산만하다’며 그의 작품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판에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렘브란트나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잠시 숨을 멈추게 하는 감동을 스테인의 그림에서 기대하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스테인의 작품이 뿜어내는 친근함도 매력적입니다. 모든 면에서 너무 완벽한 친구보다는 적당히 허술한 친구가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요. 스테인의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고, 재미가 있고,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그런 기분 좋은 에너지가 있습니다.

사실 이는 장르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장르화가 나오기 전까지 서양에서는 종교나 신화, 역사 그림을 가장 훌륭한 그림으로 쳤습니다. 그다음이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였죠. 매일매일 반복되는 흔한 일상생활은 오랫동안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장르화 화가들은 일상 자체, 그러니까 평범한 삶에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봤습니다.

스테인이 장르화의 최고 거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림 실력만 빼면 그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자란 점도 많았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상과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았던, 그런 정감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친근감 덕분인지 스테인은 오늘날 네덜란드 화가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화가이기도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수백년이 흐른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집이 엉망일 때 이런 표현을 쓰거든요. “얀 스테인의 집 같구먼(Huishouden van Jan S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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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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